와운 천년송
32. 와운마을 천년송
구름과 벗하는 서낭나무
지리산 뱀사골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길은 보기 드물게 비포장도로가 한참 이어진다. 덜커덩! 덜커덩! 자동차도 허덕인다. 노각나무, 나도밤나무, 합다리나무 등 이름도 생소한 나무들이 숲 속에 섞여서 나무 터널을 만들어내는 숲길이다. 3㎞쯤 올라가다 왼편에 새로 만들어진 다리로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시멘트 포장길을 만난다. 끝자락 작은 산골마을이 남원시 산내면 부운(浮雲)리 와운(臥雲)마을이다. 이름 그대로 하늘에 떠다니는 한 조각의 뜬구름을 이웃으로 하는 곳, 지나가던 구름도 힘이 들어 아예 드러누워 버린 첩첩산속이다.
와운마을 뒷동산에 동서로 뻗은 산등성이, 지리산 큰 봉우리 중의 하나인 명선봉에서 영원령으로 타고 내려온 해발 800m의 곳이다. 그 가운데 우뚝 선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지리산 거봉들을 마주보면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다. 약 20m의 간격을 두고 아래쪽에 큰 나무가 있고 위쪽은 이 보다 조금 작다. 큰 나무를 할매나무, 작은 나무는 한아시(할아버지)나무다. 할매나무를 예부터 천년송(千年松)이라 불렀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일컫는 기본단위다. 천년송이란 이름으로 천년 복을 주는 나무로서의 염원을 담았다.
이곳에 처음 사람이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다.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구름들도 쉬어 가는 이 높은 골짝에 터를 잡았다. 삶이 힘들 때 우리 민족 누구나 그러하듯 서낭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소원을 빈다. 당시에 벌써 동네 뒷산에는 천년송이 제법 큰 나무로 자라 있었다. 이 소나무 밑에다 조그만 제단을 만들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관으로 선발된 사람은 섣달그믐날부터 외부 출입을 일절 하지 않고 행동을 삼갔다. 뒷산 너머의 산지소(沼)에서 목욕재계 하고 옷 3벌부터 마련한다. 한 벌은 평상복, 또 한 벌은 측간을 갔다 온 다음 입는 옷이고, 마지막 한 벌은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옷이었다. 혹시라도 부정을 탈까봐 취해진 특별조치다. 어쩌다 제사가 소홀한 해에는 어김없이 서낭신의 노여움을 샀다. 감이 제대로 열리지 않고 토종꿀도 적게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실화도 들을 수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70여년전, 자식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매일 새벽 천년송에 달려가 비는 부부가 있었다. 어느 겨울날 눈이 쌓여 갈 수 없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꼬리로 눈을 치워 주었다한다. 이날의 특별한 치성은 바로 효력을 나타냈다. 드디어 태어난 아이가 지금 거제도에 거주하는 김항신 할아버지라고 한다.
천년송은 둘레가 세 아름, 키가 20m에 이른다. 원뿔꼴의 아름다운 품새에다 검붉은 몸체는 썩은 곳 하나 없이 건강미가 넘쳐흐른다. 한아시나무는 한 아름이 좀 넘는 크기에 불과하다. 사실 소나무는 암수가 같은 나무에다 바람으로 수정을 한다. 할매나무와 한아시나무의 구별은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기준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천년송의 나이는 약 500살. 임진왜란 때 사람이 처음 들어올 당시 벌써 나무가 있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짐작한 나이다. 이렇게 가운데가 썩지 않은 건강한 나무는 줄기에 구멍을 뚫어 정확한 나이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구태여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나무에 입힌 작은 상처를 통하여 병균이 들어갈 우려 때문만이 아니다. 전설을 믿어온 사람들의 꿈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금은 애매하고 황당할지라도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런 민속학적인 나이에 더 애착이 갈 때가 많다. <박상진/경북대 교수
문화재 이름 : 지리산 천년송
천연기념물 424호 2000년 10월13일 지정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