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의 산 중턱에 있는 벽송사
벽송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천년의 고찰로 알려져 있으며 서산대사,사명당,경허선사,초월동조대사 등 108분의 유명한 조사들을 배출 하였다고 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빨치산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도 함께 간직한 사찰이다
빨치산이란? -비정규 유격대 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의 팔티잔(partizin)에서 파생된 외래어이다
6.25동란 때 인민군들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벽송사 절은 국군에 의해 완전히 타 버렸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벽송사 뒷산의 선녀굴에는 마지막 여성 빨치산 정순덕이가 13년간을 은거하며 지냈던 곳이다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정순덕의 인생
정순덕이는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출생하여 16세에 역시 산청군 시천면 출신의 남편 성석근과 결혼한다
남편이 동란 때 북한군에 포섭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동란이 끝나자 빨치산 남편을 찾아 내라는 지리산 토벌대의 고문에 못이겨 남편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1955년 대규모 남부군 소탕 작전이 실시되기 전에는 함양,산청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었던 곳이다
대규모 소탕작전으로 정순덕의 남편과 대부분의 빨치산은 사살이 된다
그러나 마지막 까지 남았던 정순덕,이은조,이홍이 3명은 추성리 벽송사의 뒷산 선녀굴로 은신처를 옮겨 생활하다
1962년 2월 선녀굴에서 매복경찰에 의해 이은조는 사살되고 이홍이와 정순덕은 자신의 고향인 산청군 내원골로 다시 피신하여 있다가
1963년 11월에 고향에서 이홍이는 피살되고 정순덕은 다리부상으로 생포된다
좌도 우도 몰랐던 순박한 시골아낙의 슬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정순덕은 살아서는 나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바꾸고 1985년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특별석방이 된다
23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그녀는 고향에 있는 부모 묘소를 찾았지만 고향 마을사람들의 싸늘한 냉대에 갈 곳을 잃고 출소한 미전향 장기수들의 수용시설로 들어간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미전향 장기수들의 북쪽 송환이 이루어지자
정순덕도 북쪽으로의 송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국은 이미 대한민국으로 전향서를 작성하고 풀려 났기에 북송은 불가 판정을 내린다
순박한 산청군 내원골의 처녀는 끝까지 대한의 국민이기를 거부하며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2004년 인천의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역사를 이념의 대립으로 몰고간 큰 물줄기의 인간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정순덕의 슬픈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주검은 비전향 장기수 사망자들의 묘역인 파주시 보광사 연화공원에 안장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녀의 묘비에 이렇게 적고있다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 전사
하나된 조국의 산천에
봄 꽃으로 돌아 오소서!"
그러나 이 비석도 유공자단체의 반발을 사 조계종 승가원에 철거를 요청하지만 승가원은 거절한다
급기야 2005년 보수단체 HID청년동지회에 의해 강제로 망치질 당하게 된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더러운 이념대립에 의해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한 한많은 여인의 삶이었다
[출처] 지리산 이야기(10)-벽송사와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작성자 무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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